고추의 남방 전래설
고추의 남방 전래설 우리나라 사람이 유독 즐겨 먹는 고추는 사실 김치의 역사만큼이나 우리나라의 식품역사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기에(북방 전래설) 고추를 빼고 김치, 고추장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보편적인 생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최남선의 『고사통(故事通)』이라는 역사서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발견된 백과사전 격인 『산림경제(山林經濟)』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고추와 관련된 이름과 재배법이 처음으로 기술되고 있었음을 근거로 유럽의 고추가 담배와 같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갖고 들어 왔을 것이라 추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성우가 이수광의『지봉유설(芝峰類設)』의 왜개자(倭芥子)를 언급하면서 왜자로 보아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논문에서 말해도 좋을 것 같다는 추정이 마치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남방 전래설을 정설인양 생각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는 마치 고추가 일본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남방 전래설이 사실인양 인식하고 기술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 고추의 어원
우리나라 고추의 어원은『산림경제(山林經濟)』12)에 나오는 남초(南椒), 남(만)초 (南蠻草), 당초(唐椒), 왜초(倭椒), 『성호사설(星湖僿說)』13)에 나오는 번초(番椒) 등으로 불린 듯하다고 한다. 또한 고추라는 어원은 고초(苦椒)라는 단어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봉유설(芝峰類設)』에 나오는 왜개자(倭芥子)가 과연 한국 고추를 말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전에는 당초(唐椒), 호초(胡椒)라 불리던 것이 왜 갑자기 왜개자(倭芥 子)로 불렸을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왜개자(倭芥子)가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는『지봉 유설(芝峰類設)』의 근거로 고추가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을 단순히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이기에는 논리적으로 부족한 면들이 많기 때문이다. 반론으로도 고추의 어원을 왜 고초( 椒)라고 하였는가? 고추는 한반도에 순수 우리말로 고쵸라는 말로 존재하였고 이를 한자로는 초(椒)로 기록해 사용해 왔으며 비슷한 품종으로 당초(唐椒), 호초(胡椒), 번 초(番椒)가 있었는데 그것을 나중에 한자로 굳이 조어해야 할 필요성에 의하여 고초( 椒) 라고 조어하여 한자로 병행하였다가 결국 우리말 고추로 다시 살아났을 가능성을 배재하고 있지는 않은가『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椒 고쵸, 쵸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추와 관련된 음식문화
이성우와 최남선의 주장과 같이 만약 고추의 남방 전래설이 맞는 것이라면 우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왜 고추를 가지고 왔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고추를 군인이 가지고 왔다면 그것은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들어왔을 것이다. 다시 말해 담배와 같이 단순히 군인들의 기호식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왔다는 것은 충분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식량 주재료든지 부재료든지 일본군이 가지고 들어왔다면 과연 그들이 어떤 식품을 먹었기에 고추가 그렇게 필요하였을까? 이 점에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이전에 고추 를 이용한 일본의 전통음식이 존재했는지는 몰라도 근세에 일본에는 군인들이 꼭 고추를 이 용해 먹어야 할 음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추를 이용한 음식으로 보면 우리나라에 김치와 고추장이 존재했고 중국의 생홍초장 등이 대륙에 존재했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 이전에 백김치 밖에 없었던 김치의 종류가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오자마자 겨우 1~2백년 만에 전국적으로 수백 가지 종류의 김치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현재의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측면이 있다. 일본의 군인들이 자국에서조차 먹지 않았던 고추를 왜 전쟁 중에 가지고 왔을까? 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지봉유설(芝峰類設)』에 나온 것과 같이 상비약 성격으로 가지고 들어온 겨자를 일본군이 들여왔기에 왜개자(倭芥子)로 부르게 된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고추와 관련된 구전
구전설화와 관련된 내용은 정확한 자료 없이 과학자가 언급하기에는 참으로 조심스러운 문제지만 세월을 거쳐 구전되어온 이야기들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구전되어온 내용 중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에 무학대사와 전라북도 순창의 만일사에서 고추장을 먹었을 때 그 맛이 워낙 좋았기에 조선을 건국한 후 순창고추장을 진상토록 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우리는 사실유무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필요는 충분히 있으며 현재로써도 이러한 구전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어 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가지의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의 행주산성 싸 움에서 우리 아낙네들이 왜군을 향해 돌을 던져 일본군을 무찌를 때 고춧가루를 함께 뿌려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라면 어떻게 임 진왜란 때 들여 온 고추를 재배하여 역으로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가지고 들어왔다면 일본군이 요즈음 화생방과 같이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들어왔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또한 아직 인용된 문장을 정확히 찾지 못하였지만 최치원의『계원필경(桂苑筆耕)』에 보면 고초당초 아무리 맵다하기로 시집살이보다 매울까?라는 문장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확한 번역을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임진왜란 이전에 고초(苦椒)는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었고 식용으로도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문헌이라 하겠다.
마치며
결론적으로 한국의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 전해졌다는 남방 전래설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오히려 당초(唐椒), 호초(胡椒), 고쵸 ( 椒)와 같이 우랄알타이어족의 이동 아니면 북방에서부터 우리나라의 고추가 들어오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북방 전래설에 더 무게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북방 전래설에 대해 좀 더 시간을 두고 검토할 시기가 되지는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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