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증해결]

우리나라 최초의 일기예보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일기예보에 얽힌 이야기

슈가콩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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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일기예보

1905년 11월 1일 예보 맑음으로 시작하는 일기예보가 현존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예 보의 기록이으로 이 예보를 발표한 최초일기도가 가장 오래된 기상표이다.

최초의 일기도 천기도
최초의 일기도 천기도

이 기상표는 이 날의 일기도 3개는 최초의 일기도인 천기도, 변화도, 기상표이며 표의 오른쪽 중간에 천기예보란이 있고 거기 맑음이라고 적혀 있다. 표의 좌중앙에는 일련번호 18번이란 도장이 찍혀 있으며 이날의 첫 일기도인 천기도에는 14번이란 도장이 찍혀 있고, 중앙하방에 4쪽이란 표시의 4가 수기로 적혀 있다. 처음 정리할 때는 이 일기도 앞에 13장의 자료가 더 있었다는 뜻이며 두 번째 정리할 때는 3장이 더 있었다는 뜻이다. 11월 1일 자료는 14번부터 시작하여 18번으 로 종료되면서도 3장밖에 없는데 왜 3장만 남았는지 알아낼 길이 없으나, 일련 번호 도장을 찍은 사람이나 수기한 사람이 함부로 취급했을 가능성이 고려되며 일련번호는 1980년대 쯤, 일기도 자료를 마이크로필름에 보관하면서 찍은 것으로 보이니, 약 80년 세월에 종이는 부서지고, 기록은 흐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11월 2일부터는 하루 3장의 일기도가 일정하게 보관되어 있는데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일기도들은 대한민국 기상업무 발달의 여명기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 들을 기억하게 한다. 

변화도기상표
변화도와 기상표

러일전쟁의 발발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는 일본이 예보를 시작한지 22년째 되는 해이며 여순항 전투와 제물포 전투에서 기상예보의 필요성을 절감 했으리라 보며 압록강 전투(1904년 5월)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기상관측망을 깔았던 것으로 보이며 봉천 전투(1905년 3월)와 동해해전(1905년 5월, 소련은 쓰시마 해전, 일본은 일본해 해전이라 부름)은 한반도에 공식적 기상 관측망이 전개된 후에 치룬 전쟁이다. 기록은 1905년 11월 1일이 처음이나, 그 전에 예보기술이 이미 실용화되어 음양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부산 등에서 위탁관측 등의 방법으로 분명히 기상관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측된 자료를 토대로 예보가 아닌 예측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실제로 청일전쟁(1894년) 당시와 러일전쟁의 동해해전시의 일기도라고 추정되는 일기도가 등압선 두 개 정도 그려진 상태로 전해 오며 일기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출처도 분명치 않으며 정기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어서 최초의 일기도라 보기는 좀 미흡하다.

 

기상관측 기술의 발달

기상관측이란 목측이 아닌 기계에 의한 측정을 말하는데 기상 예보를 하려면 먼저 기상관측 기술이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토양에 침투 한 습기의 깊이에 대한 첫 정량적 관측은 우택이라 하여 조선의 태조때(1398년)가 시초이다. 강수량의 첫 정량적 관측은 세종대왕 때(1438년 5 28일, 한수당 연구원 주장, 국제적으로는 1441 년으로 알려져 있음)이다. 기압의 첫 정량적 관측은 토리첼리(1643년)이고, 기온의 첫 정량적 관측도 1643년으로 독일의 A. Kircher에 의해서 이다. 풍속계는 이탈리아의 수학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50년)가 시작이나, 바람의 정량적 관측은 조선시대의 관상감에서 기록한 풍운기(風雲記, 1740년)이다. 영국의 보퍼드가 만든 보퍼드 풍력계급은 1805년 시작되었으나 계측이 아니라 목측이었다.

1846년 아일랜드의 John Thomas Romney Robinson이 풍속계를 발명하여 본격적 인 풍속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종합적인 기상관측이 시작되었다. 한반도 근해에서 최초의 온도와 기압의 관측은, 프랑스의 La Perouse 일행이 Boussole호 항해일지에 1787년 5월 22일 제주도 부근 해상의 기온이 11.5도(현재의 14.4℃)였다는 기록이다. 한국의 조선총해관(관장은 총세무사 Moellendorff, 한국명 목인덕)은 1883년 인천, 부산, 원산의 해관의 구내에 근대적인 기상관측기기를 설치하고 하루 6번 연안의 정규 기상관측을 실시했는데, 이중, 부산에서 8월 12일로 가장 빨랐으니, 근대적 종합 기상관측의 시작은 이날로 잡는 것이 맞을 것이다. 1884년 6월 16일부터는 부산의 초량에 있는 일본전신국에서도 일본 중앙 기상대의 위탁을 받아 기상관측을 시작했으며 일본이 조직적 기상관측을 위한 일본의 정식 편제를 시작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한 후이다. 3월 5일 일본정부칙령 제60호로 일본 중앙기상대 산하에 9개의 임시관측소를 개설하기로 했고, 3월 7일에 제1 임시관측소를 부산 서정삼정목(西町三丁目) 31번지에 있는 민가를 차입하였다. 3월 8일에는 임시관측과장 와다유지가 임명되었고, 9일에는 와다유지가 부산에 부임하였다. 제2 임시관측소는 목포의 팔구포(전남 신안군 하의면 옥도리)에서 3월 25 일에 시작했으며 한국인 근무자는 단 한명도 없는 일본의 조직이었다.

 

한국에 기상관측망의 개설

대한민국 기상청은 근대기상 100주년 기념일을 3월 25일로 잡았으며 옛 목포 기상대 터에 세워진 비석을 보면, 1904년 3월 대한제 국 칙령 제60호에 의거 3월 25일 창설되었으며, 당일 바로 관측을 시작한 것 으로 되어 있다. 일차적으로 일본정부 칙령 제60호를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남는다. 둘째로 1904년 당시의 국격을 살펴보면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1905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했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때 과연 대한제국 칙령 제60호가 발표 되었을까? 셋째로, 부산은 3월 8일에 관측과장이 취임하였는데도 관측을 개시하지 않았고, 팔구포는 창설되자 마자 바로 관측을 시작하였다는 설명의 신뢰성이다.

목포대 근대기상 100주년 기념비
목포대 근대기상 100주년 기념비

 

한국 근대 기상의 시작점

기상업무란 기상관측과 기상분석과 기상예 보의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우선 각각을 근대와 고대로 나누자면, 기상관측은 기계를 이용한 관 측인지 아니면 목측인지로 구분된다. 분석은 과학적 정량적 분석인지 아니면 감성적 분석인지로 나뉜다. 예보도, 공식적 기관에 의해 발표된 예보인지 아닌지로 구분된다. 이들은 다시, 조직 적 수행인지 아닌지로 구분되며 1392년에 조선에서 세계 최초의 우택관측이 있었으니, 이로부터 따지면 2012년은 620주년이다. 우택에서 토질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 공인하기 곤란하다 면 1438년 5월 28일에 있었던 최초의 강우량 관측이 근대 기상의 시작점이 된다. 관측 자료가 남아있는 것만 시작으로 잡는다면, 1770년 5월 25일부터이니 242주년이 된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다뿌리치고, 말썽도 많은 1904년 일본기지의 관측시작일을 근대기상의 시초로 결정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 근대 기상의 시작점의 결정은 재고되어야 하며 측우기 관측 시작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며 종합기상관측의 시작점이나, 기상예보의 시작점은 따로 결정해 두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최초의 일기예보가 1905년 11월 1일임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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