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증해결]

도루묵이라는 생선은 무엇일까? 말짱 도루묵 속담에 얽힌 이야기

슈가콩 202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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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따지고 보면 도루묵이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생선은 아니다. 입맛 이야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맛없는 물고기가 아니다. 나름 특별 한 맛과 멋이 있다. 통통하게 살찐 도루묵 구이는 별미다. 얼큰한 도루묵 조림과 찌개는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게 만 드는 밥도둑이고 막걸리에 소주를 부르는 술 도둑이다.

도루묵과 선조 임금 이야기, 말짱 도루묵

도루묵은 맛없는 생선의 대명사 쯤 된다. 맛이 없으니 도로 묵이라고 하라며 까탈을 부린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의 선조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배가 고팠던 선조가 수랏상에 올라온 생선을 맛있게 먹은 후 그 이름을 물었다. 묵이라는 생선이라고 하자 맛있는 생선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라며 즉석 에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환궁한 선조가 피난지에서 맛보았던 은어가 생각나 다시 먹어보니 옛날 그 맛이 아니었다.

형편없는 맛에 실망한 임금이 역정을 내면서 도로 묵이라 고 불러라고 해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도루묵에 얽힌 전설이다. 강원도 바닷가라면 좀처럼 맛보기 힘든 도루 묵회에 도루묵깍두기, 도루묵 식해가 별미다. 도루묵이 맛없다는 오명은 이름 때문에 생긴 선입견이다. 누명 때문에 온 천하에 형편없는 생선이 라는 오명을 쓴 채 몇 백 년을 보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도루묵의 어원은 과연 진실일까?

도루묵은 주로 강원도와 함경도, 그리고 지금이 경상북도 바닷가에서 잡히는 생선이다. 그런데 선 조는 도루묵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간 적이 없다. 임진강을 건너 평양을 거쳐 의주로 갔으니 실제 피난길에서 도루묵을 먹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도루묵의 유래가 적힌 조선시대 문헌 에도 선조가 도루묵을 먹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도루묵의 유래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광해군 시절에 귀양을 갔을 때 쓴 전국팔도 음식평론 서인 『도문대작』에 실려 있다. 은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동해에서 나는 생선으로 처음에는 이름이 목어(木魚)였는데 전 왕조에 이 생선을 좋아하는 임금이 있어 이름을 은어라고 고쳤다가 너무 많이 먹서 싫증이 나자 다시 목어 라고 고쳐 환목어(還木魚)라고 했다.

한자어 환목어를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 바로 도루묵이다. 허균이 전 왕조라고 했으니 도루묵이라 는 이름을 만든 주인공은 실제 선조가 아니라 바로 고려 때의 어느 임금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역시 광해군 때 벼슬을 살았던 택당 이식의 환목어라는 시에 나오는데 도루묵의 주인공이 선조 임금이라는 말은 없다. 그저 임금님이 왕년에 난리를 피해 황량한 (동해안) 해변에서 고난을 겪다가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적었다.

진짜 도루묵을 먹은 임금은 누구일까?

선조가 아니라면 동해안 쪽으로 피난을 가서 도루묵을 먹었다는 임금은 과연 누구였을까? 도루묵 을 먹으며 역정을 냈다는 임금이 누군지는 여러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임진왜란 때의 선조로 알려 져 있지만 1904년 4월 9일자 황성신문에는 인조라고 나온다. 또 정조 때 이의봉이 쓴 고금석림(古今 釋林)에는 고려의 어느 임금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광해군 때의 허균과 이식과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서울인 개성이나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던 임금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11세기 때는 고려 현종이 거란족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간 적이 있다.

그리고 13 세기에 고려 고종이 피난은 아니지만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해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14 세기에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상도 안동으로 피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16세기 말,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는데 함흥으로 갈까 의주로 갈까 망설이다 결국 의주로 떠났다. 그리고 17세기 인조가 세 차례에 걸쳐서 한양을 비웠는데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그리고 이괄의 난 때는 충청도 공주로 몸을 숨겼다.

그러니 도루묵이 잡 히는 고장인 동해안으로 피난을 떠났던 임금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처럼 전쟁의 와중에서도 쓸데없이 음식투정이나 부 렸던 임금으로 선조를 지목했던 것일까? 선조나 도루묵이 왜 모두 누명을 썼는지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굳이 짐작하자면 전란에 시달 렸던 백성들이 마땅치 않았던 임금에 대한 원망을 도루묵 이야기와 연결 지었던 것일 수 있다. 지도자 의 의무는 부하를 제대로 이끄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나자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갔으 니 도루묵에 빗대어 역사의 조롱거리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굳이 도루묵의 주인공을 선조와 연결 지은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도루묵 이야기를 기록에 남긴 허균이나 이식의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허균이나 이식은 모두 선조 다음 임금인 광해군 때의 인물이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전 왕조(前朝)라고 표현했고 이식은 왕년(昔)의 임금이라고 표기했다.

그러니 전 왕조를 전 임금으로, 왕년의 임금을 직전의 임금으로 연결지은 것이 도루묵의 주인공이 선조가 된것이 아닐까 싶다. 역시 나라를 지키지 못했던 임금에 대한 원망이 컸기 때문에 생긴 이야기일 것이다. 도루묵의 또 다른 이름인 은어도 그렇다. 배고픈 임금이 너무나 맛이 좋아 은빛이 도는 물고기라는 뜻에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하지만 조선 후기 정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가 쓴 『난호어 목지』에는 이름의 유래가 다르게 적혀 있다. 물고기의 배가 하얀 것이 마치 운모가루와 같아 현지 사 람들이 은어라고 부른다고 했으니 은어는 임금이 하사한 명칭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이 었다. 특산물이었던 도루묵, 도루묵은 맛없는 생선이 아니다.

도루묵의 유래

도루묵의 유래로 인해 도루묵은 으레 맛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옛날 문헌을 보면 도루묵은 동 해안의 특산물 이었다. 지금은 경상북도인 울진 이북의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두루 잡히는 생선이었는 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정에 공물로 바치는 지역 특산물이었다고 나온다. 특히 강원도와 함경도의 어부들은 겨울이 되면 한양으로 올려 보내야하는 도루묵 때문에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던 모양이다. 『정조실록』에는 양양과 간성에서 은어를 공물로 바치느라고 백성들이 고 통을 겪는데 양양은 그나마 큰 고을이니까 이해를 할 수 있지만 간성에서까지 토산물로 공물을 바치는 것은 부당하니 은어, 즉 도루묵을 잡아 바치는 폐단을 시정하라는 기록이 보인다. 조정에 공물로 바쳤던 토산물 이라고 모두 고급 생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좋 게 봐도 도루묵이 귀한 물고기일 수는 없다. 하지만 말짱 도루묵 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형편없는 생선은 아니었다.

특히 도루묵이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기는 했지만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 한양에서 도루 묵을 맛보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요가 공급에 크게 미치지 못하니 도루묵에 대한 당시 양반들 의 인식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도루묵은 선비 집안의 제사상에도 올랐던 생선이다. 정조 때 문인인 박영원(朴永元)이 남긴 문집 인 오서집(梧墅集)의 시곤록(示昆錄)에 도루묵인 환목어로 제사를 지낸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시곤록은 자손들에게 당부하는 교훈을 담은 글이다. 여기에 제사는 성의가 첫째로 성의가 없는 제사는 지내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제수는 정갈한 것이 중요하니 풍족하게 차리지 않아도 괜찮다. 제수를 풍부하게 차리다 보면 정결하기를 소홀히 할 수 있으니 정성을 다하기 힘들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도루묵을 하타하타(はた-はた)라고 한다. 천둥 치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로 일본 고어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도루묵은 음력 11월에 주로 잡히는데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천둥과 번개가 많이 치는 계절에 도루묵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일본식 한자로는 도루묵을 물고기 어(魚)변에 귀신 신(神)자를 써서 표기하는데 신과 같은 물고기라는 뜻이 아니라 옛날 일본에 서는 천둥을 신이 내는 북소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역시 천둥이 많이 칠 때 몰려오는 물고 기라는 뜻이다. 하타하타는 또 겨울철 동해의 파도가 거세질 때 잡히기 때문에 파도가 많이 친다는 뜻의 파다파다(波多波多)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도루묵이 고급 생선은 아니지만 예전 서민들은 지금보다 더 다양하게 조리했다. 구이와 조림, 찌개는 물론이고 도루묵으로 회도 치고 식해도 담갔다. 또 도루묵 깍두기는 별미였으니 토막 친 생선을 무 와 버무려 깍두기를 담고 김치를 담을 때 대구나 동태 대신 도루묵을 넣어도 훌륭한 맛이 난다고 했다. 말짱 도루묵이 아니라 서민의 사랑을 받는 생선이었다.

 

도루묵
도루묵의 유래 말짱도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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