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주는 발효되면서 재료에 따라, 빚는 방법에 따라, 발효원이 되는 누룩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술을 빚는 횟수나 빚는 시기에 따라 각 각 다른 맛과 향기가 달라진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과 의미에서 문배주는 우리 전통주가 방향주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매우 상징적인 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문배주란‘술에서 문배 향기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기 때문이다.
문배란?
문배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토종 돌배(문배)로서, 그 크기가 아이들 주 먹만하고 매우 단단한 조직이 특징으로, 일반 배와 비교하여 상큼한 맛과 함께 독특한 향기를 자랑하는데, 누룩과 곡물로만 빚는 술인데도 바로 이 문배향기가 난다는 술이 문배주이다. 따라서 전통주가 곡자향이 아닌 과실향기를 자랑하는 방향주라는 사실 을 입증하는 술이 바로 문배주라고 할 수 있다. 문배주는 1996년 문화관광부로부터 향토술 담그기부문 중요무형문화재 제86-가호로 지정(기능 보유자 고 이경찬)되었다. 이경찬의 사후 장자인 이기춘이 그 기능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술중에서 전통과 역사성을 간직한 전통주로서, 국가와 시 도지사가 그 가치를 인정하여, 무형문화재나 명인으로 지정하여 지도관리 하고 있는 주품은 무형문화재 31종(중요무형문화재 3종 포함), 명인 16종 (무형문화재 11종 중복 포함)인데, 문배주처럼 술향기에서 이름을 따 온 전 통주는 단 한 가지도 없다. 그 예로 문배주와 같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경주교동법주는 산지 와 술빚는 법에서, 면천 두견주는 산지명과 부재료에서 따 온 명칭이다. 또 지방의 무형문화재와 명인의 술, 그리고 관광토속주로서 술 빛깔에서 얻은 술로는 진도 홍주와 용인의 옥로주가 있고, 증류주라는 뜻의 고소리 술이 있다.
술의 재료에서 이름을 빌어 온 술
송절주, 송순주, 송로주, 송화주, 한옥로, 의이인주, 사삼주, 이강주, 감자술, 송죽오곡주, 국화주, 구기주, 과하주 등이 있으며, 술빚는 법에서 그 이름을 빌어 온 술로는 향온주, 오 메기술, 소곡주가 있고, 술의 발효기간에 따른 술로는 계룡백일주, 계명주가 이에 속하며, 약재를 사용하여 장수를 의미하는 술로는 청원신선주와 담양 제세팔선주(추성주), 칠선주를 들 수 있으며, 술빚는 시기에 따른 이 름으로 삼해주, 청명주가 있다. 이 외에 술빚는 이의 이름을 따온 술(옥선주)과 부재료와 발효기간을 뜻 하는 술(송화백일주), 전승내력(가야곡왕주), 산지명(안동소주, 산성소주, 호산춘), 술빚는 유래(진양주), 발효형태(부의주) 등 다양한 분류를 보이고 있으나, 문배주와 같은 예의 술 이름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문배주의 중요성이 강조되기에 이르는데, 그렇다면 언제 부터 문배주가 빚어졌고 어떻게 해서 문배향기가 나는 술이 되는지, 그리 고 다른 지방에서 빚어지고 있는 술빚기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특히 어 떻게 해서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문배주는 평안도의 도읍이었던 평양지방의 토속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러나 불행하게도 음식과 관련한 여러 옛 문헌이나 그 어떤 기록에서도 문 배주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어떻든 구전(口傳)하는 바로는 문배주가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빚어졌으 며, 그 역사가 고려시대 때부터라고 하는 바, “고려 태조 왕건 시대에‘신 하들이 왕에게 다투어 좋은 술을 진상하여 벼슬을 얻었는데, 그 중 문배주 를 진상한 신하가 가장 높은 벼슬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 그 가문에서는 문배주 양조비법을 비밀로 하여 왕에게만 진상하여 왔으나, 고려 중엽에 이르러 문배주 제조비법은 후손들에 의해 일반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고려시대의 어떤 문헌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문헌이나 기록이 없다는 사실로서, 문배주 제조 기능 보유 자의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다행이랄까.
문배주와 관련한 설화(說話)
어렴풋하게나마 문배주의 역사와 유래를 짐작케 한다. 문배주는 1986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가문의 영광을 얻게 되는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어려운 세월을 딛고 일어 서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문배주는 대중주라기보다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거 나,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주였다. 평양에서도 대중에게 알려 지지 않은 채 몇몇 가문에서만 그 맥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자, 자본가 계급이었던 양조업자들은 거의 모두 피난을 내려왔 지만, 이경찬 씨 만큼 젊은 나이에 문배주를 빚던 사람이 없었고 보면,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죽었거나 더 이상 술을 빚을 수 없는 형편 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생전의 이경찬은“피난을 온 후로 서울에서 잠깐 술을 빚어보았지만, 1955년에 제정된‘양곡관리법’ 에 의해 양곡으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게 되자, 그 일도 그만 두 게 되었다. 그러나 술빚는 일이 몸에 밴 터라 그 일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어, 차례와 제사 때 빚 어 올리거나, 친구들 애경사에 선 물하는 재미로 술을 빚곤 했다. 아무리 법이라고는 하지만 문배 주의 전통기법을 계승해야 한다 는 생각과 그것만이 일생의 과제 라는 일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고 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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