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치료제로 사용되었던 차
차의 기원은 약리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요 기원전 2732년, 차를 발견해 인류에게 전한 사람은 중국의 전설적인 황제 신농(神農)이라는 설이 강력하다. 신농은 인간에게 이로운 풀과 해로운 풀을 구분 짓기 위해 온갖 약초를 먹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진 적이 많았다. 여느 날처럼 산과 들을 누비며 약초를 찾아 헤매던 신농은 바람에 날아온 마른 잎이 자신이 마실 물 위에 떨어진 것을 보고, 호기심에 그 맛을 본다. 그런데 물을 마시고 나니 독초의 기운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 뒤로 신농은 독초를 먹었을 때면 차로 해독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차 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한 중국 당나라 무렵에도 차는 주로 약용(藥用)이었다.
다경(茶經)을 저술 한 당나라 육우는 그의 저서에서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생기고 마음이 즐거워진다라고 말했다. 일본에 차문화가 들어온 데는 승려 에이사이(榮西)의 공적이 컸다. 그는 12세기 송나라에서 차나무 씨앗을 품고 돌아와 차 보급에 힘썼다. 에이사이는 차를 두고 사람의 목숨을 늘리는 기묘한 술법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정신 수양을 위한 도구로 차를 사용했는데, 차 마시는 행위를 불교의 참선과 동일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차를 약용으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 대선사 초의선사가 집필한 동다송 (東茶頌)을 보면 차는 인간에게 좋은 약과 같으며 우리나라 차는 중국차에 비해 약효나 맛에 있어서 뒤지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또 다산 정약용 선생도 체기를 내리기 위한 약용으로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중국차, 유럽과 신대륙을 매혹시키다
차는 하나의 고도화된 문화로 발전하면서 전 세계 로 퍼져나갔다. 마카오에 무역기지를 건설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제일 먼저 차를 알리기 시작했다. 1602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중국차를 수입해 유럽을 비롯한 신대륙에 보급했다. 당시 차는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닌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유럽 상류층의 입맛을 사로잡은 중국차는 점차 서양 상인들의 탐욕을 자극 한다.
1689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차를 직수입하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선점하고 있던 중국차 시장을 독점해가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은 해상무역 시장에서 네덜란드를 제치고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중국차 수입의 주도권을 차지한 뒤에는 유럽 전체에 차 문화를 전파했다. 귀족부터 중산층까지 티타임(Tea Time)을 즐긴 것이다. 차를 향한 영국인들의 애정은 못말렸다. 영국은 연간 10만 톤이 넘는 중국차를 수입해야 했으니 신대륙에서 약탈해 얻은 금과 은이 중국으로 대량 유출됐다. 영국은 본토에서 차를 직접 재배하려 했으나 기후가 맞지 않아 포기하고 만다. 이후 영국은 식민지로 삼은 인도와 스리랑카, 케냐 등지에 대단위 차밭을 꾸려 유럽식 홍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린, 보스턴 차 사건
전 세계인을 매료시킨 차는 전쟁을 일으킨 촉발제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차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18세기,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당시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정부는 동인도 회사의 파산을 막고자 차 수출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고 수출관세 또한 면제해주었다. 관세를 피하 면서 차를 밀수해 팔던 미국 이주민들은 여러모로 동인도 회사에 유리한 영국 정부의 조치에 크게 반발했다. 1773년 12월, 결국 성난 미국인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배에 올라타 그곳에 실려 있던 차를 모 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영국 정부는 미국인들이 더는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1774년 징벌적 법안 「보스턴 항구법」을 제정하고 보스턴 주민들에게는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인 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영국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이 사건은 1775년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781년, 마침내 미국은 독립에 성공한다.
차가 촉발시킨 또 다른 사건, 아편전쟁
차는 19세기 영국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진 아편전쟁의 주범이었다. 영국은 차를 수입하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벌어들인 은을 중국으로 넘겨야만 했다. 차를 사들일 은이 부족해지자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몰래 수출한다. 삽시간에 중국에는 아편 중독자가 늘어났다. 영국이 중국에서 가져오는 홍차의 양보다 중국이 영국에게 원하는 아편의 양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이에 중국은 특별 관리였던 임칙서를 광저우로 보내 아편을 몰수하도록 했다. 임칙서는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영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함대를 동원해 중국 주산열도를 점령하는 등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영국군의 막강한 힘에 밀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중국은 1842년 중국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난징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넘겨받은 뒤 다섯개 항구에서 자유롭게 무역 활동을 펼치게 된다. 차를 향한 인류의 사랑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차는 진한 향취를 뿜어내며 여전히 세계사 한편에 자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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