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야기] 통일신라의 차 문화, 우리민족의 차 문화, 고대의 차문화 기록, 신라의 차문화 근원
[차이야기]

[차이야기] 통일신라의 차 문화, 우리민족의 차 문화, 고대의 차문화 기록, 신라의 차문화 근원

슈가콩 202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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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세기 통일신라의 차와 관련된 기록은 많지 않으며 게다가 대 부분 단편적이어서 당시 차 문화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 만 ≪三國遺事≫, ≪東文選≫, ≪孤雲先生文集≫ 등 실존 기록들을 통해 신라인들이 마셨던 차의 종류, 음차법, 茶具, 차의 정신, 음차 풍속, 그리고 당나라 차 문화와의 상이점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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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차 문화의 근원

법흥왕(재위 514~540)이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고, 532년 김해를 중심으로 세력을 뻗쳤던 본가야를 정복하 고, 진흥왕(재위 540~576) 562년에는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정벌한 6세기를 신라 차 문화가 뿌리를 내린 시기로 추측된다. 김해와 고 려는 가야국의 주요 차 생산지였으며 불교의 수용은 중국문화를 수 용한 것으로 종교뿐만 아니라 차 문화도 수용했으리라 짐작된다. ≪三國史記≫ 신라본기 흥덕왕 3년조에는 차의 전래에 대해 다음 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제42대 왕) 3년(828) 겨울 12월에 사신을 唐에 보내어 朝 貢하니 文宗(재위 827~840)이 麟德殿으로 召對하여 잔치를 베푸는 데 차 등이 있었다. 당에서 돌아오는 사신, 大廉이 차의 종자를 가지고 오니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 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위 기록으로 보아 신라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이미 신라 고유의 차가 있었으며 흥덕왕 때 이르러 음차풍속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초기 김해, 고성 등지에서 생산된 차로 국가의례나 각종 행사에 신라 고유의 차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大和 2년(828) 당 문종이 견당사 대렴에게 서적과 차 종자 등을 하사했으며 흥덕왕이 그 차 종자를 지리산에 심도록 명령한 것은 당시 점차 음차풍속이 성행해짐에 따라 그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은 차나무 생장 환경이 좋아 우수한 품질의 차를 생산할 수 있는 재배지로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명차가 생산되는 곳이다.

 

흥덕왕이 중국의 차 종자를 지리산에 심도록 한 것으로 보아 그가 茶業에 특별한 관심 과 차에 관한 견문이 높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중국의 차를 적 극적으로 받아들여 품질이 우수하고 다양한 차를 생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왕이 직접 차 종자를 심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茶業이 국가 시책으로 추진되었으리라 추정되며 이에 따 라 통일신라의 차 문화도 이전에 비해 크게 발전했으리라 사료된다.

통일신라의 차 종류

7세기에 신라 고유의 차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료로 아래의 ≪통도사 사적기≫가 있다.

통도사(경남 양산)의 북쪽에 있는 冬乙山의 차마을(茶村)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所이다. 절에 바치던 차아궁이와 차샘(茶泉)이 없어지지 않고 지금도 남아 있으니 후인들이 다소마을(茶所村)이라 했다. 또한 자장율사의 제자인 租日火香이 어느 날 바로 東峰에 가서 산천을 살펴보고 띠집을 짓고 거기서 살았는데, 長生標를 세 우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 뒤에 이름 붙이기를 租日庵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고 한다. 사방 장생표를 세운 위치에는 논밭이 동남으로 펼쳐져 있고 북다촌인 坪郊는 거화군의 경계(경남 울주군 언양면) 이다. 또 동서의 院에는 三千大德들이 항상 나누어 살았다.

 

所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특정의 공물을 생산하여 공납하던 곳이 다. 동을산 茶村인 소에서 생산된 차는 절에 바쳐졌고 차의 제작시 사용한 차아궁이와 차샘도 남아 있다. 조일화향이 그곳에 장생표를 세우고 동을산에서 차 종자를 심고 차나무를 재배하고 차를 만들어마셨으리라 생각된다. 佛寶사찰 통도사는 조일스님의 스승인 자장 율사(590~658)가 선덕여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했다. ≪통도사 사적 기≫를 통해 7세기 당시 경남 양산의 동을산에서 신라 고유의 차가 생산되었고 통도사의 승려들은 신라의 차를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이외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도 7세기 문무왕(재위 661~681) 때 신라 고유의 차를 제물로 사용하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전한다.

(上略)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그 祭 田을 주관하여 매년 명절마다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 밥, 차, 과 일 등 많은 祭物로써 제사를 지냈으며 매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거등왕이 정했던 연중 다섯 날(정월3일 7일, 5월5 일, 8월5일 15일)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향기로운 제사는 그제야 우리에게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에 便房을 두고부터 내려와 仇衡王 말기에 이르기까지 330년 동안에 묘의 제 사는 영구히 변함이 없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 부터 龍朔 원년 신유(661)에 이르기까지의 60년 사이에는 이 묘의 제사가 간혹 빠뜨려지기도 했던 것이다.

 

신라 문무왕이 김수로왕 17대손 갱세 급간에게 제전을 주며 명령 내리니 왕명을 받들어 수로왕의 제사를 지냈는데 올려진 제물은 떡, 밥, 차, 과일 등이라는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왕의 조상에게 올리는 제물은 분명 신라의 토지에서 생산된 물건이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차도 외국의 것이 아닌 신라 고유의 차를 올렸을 것으로 보 아진다. 그리고 당시 영전에 올리는 제물에 차가 사용되었다는 점 에서 신라의 차 문화는 일정한 수준의 茶事 활동들이 많이 있었음 을 짐작하게 한다.

 

≪高麗史≫ 제64권 志 제18권 禮 6, 諸臣喪에 의하면 고려 초엽 성종은 최지몽, 최승로, 최량의 부의에 200角에서 1000角에 이르는 많은 양의 腦原茶와 大茶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전하다. 團茶인 뇌 원차와 대차를 만드는 법은 신라인의 제다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 다. 그 이유로는 고려가 후백제와 신라를 합병하기 전에는 차가 나는 호남과 영남에 영토가 없었고,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넘겨준 때는 935년으로 위의 성종이 많은 차를 하사한 때와는 기록상으로 50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또 고려는 통일한 후 신라왕조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신라의 차 문화도 그대로 수용하였 을 것이다.164) 하지만 신라시대 존재했던 차의 종류로 뇌원차나 대차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으며 뇌원차나 대차는 신라시대 단차 제조 법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차의 종류라고 짐작된다. 뇌원차는 고 려시대 이른 봄철 여린 찻잎으로 만든 御用團茶로 특급차이며 국가 간의 예품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신하가 죽었을 때 왕이 하사했던 차이다. 대차는 뇌원차보다는 등급이 낮은 덩어리 형태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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